위기의 인터넷, 위기의 네티즌 ‘연예인 X파일’의 인터넷 유포를 비롯하여, ‘지하철 개똥녀’에 대한 인터넷 여론재판,
포르노 사업자라는 누명으로 자살을 고려할 정도로 고통을 겪었다는 ‘트위스트 김씨’의 고백,
그리고 최전방 GP에서 동료 부대원에게 총기를 난사한 김아무개 일병이 온라인게임과 상관이 있을 것이란 혐의 등 일련의 상황들은 사이버 공간이 위험사회가 되었음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읽혀지고 있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성폭력, 명예훼손, 사생활침해, 각종 저작권 침해, 언어폭력, 명의도용, 사기 등 경찰청이 밝힌 2004년도 사이버 범죄 신고건수는 20만 건을 넘어섰다.
정보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마땅히 겪어야할 불편함이 참고 견디기에는 정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는지, 정부에서도 ‘사이버폭력을 추방’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이버 폭력 현상은 인터넷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실 공간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범죄를 경험하면서 살고 있고, 이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막강한 경찰력을 동원하고 있지만, 범죄가 점점 늘어가는 것을 보면, 사이버 공간에서의 폭력 역시 100가지 대책을 동원해도 줄어들 것이란 믿음을 갖기 어렵다.
사이버 공간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는 없다 윤리 규범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혼자 사는 공간에서 윤리는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사이버 공간은 구조적으로 윤리와 규범을 세우기에 매우 취약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과 비대면성의 특성으로 인해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사, 교수들도 예비군복을 입혀 놓으면, 아무데서나 주저앉고 가볍게 행동한다는 이야기처럼 자신의 정체성이 은폐될 때 인간은 쉽게 일탈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사이버 공간에서 윤리교육이나 규범교육은 어쩌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 때문에 다시 거론되는 인터넷실명제는 작금의 사이버 폭력을 추방하는 손쉬운 처방전으로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것이지도 모른다.
인터넷에서 의사를 표현할 때 이름표를 부착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을 담보로 책임 있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자는 것이 실명제의 핵심이다.
이는 안전한 인터넷 공간을 만들어가기 위해, 정보사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풀어 가야할 매우 중요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인터넷 공간이 윤리와 규범을 세우기에 취약한 두 번째 이유는 온라인 게임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온라인 게임은 다른 사용자와 경쟁하거나 대결하는 구조 속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폭력성을 띈다.
온라인게임의 이용자들은 주먹을 사용하든, 흉기를 사용하든, 총기를 사용하든, 어떤 형태로든지 상대방을 제압하고 자신의 입지를 확장해가면서 재미를 느끼게 된다.
따라서 온라인 게임의 세계에서 내가 만나는 네티즌들은
윤리와 규범을 존중해야할 타자가 아니라 제거해야할 적일뿐이다.
전쟁 상황에서는 상대방을 잘 죽여야 내가 살고, 영웅이 되기 때문에 윤리가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온라인게임 속에서도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전쟁터와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어 윤리나 규범은 구호에 불과하게 된다.
최근에는 온라인 게임 회사들이 정액제 모델보다는 부분유료화 모델을 선호하면서 돈을 주고 무기 아이템을 구입해서 게임을 진행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게임 규칙도 돈에 의해 무시되는 삭막하고 척박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변질되고 있다.
투명인간과 윤리적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전쟁터의 적과 총부리를 겨눈 상태에서 상대방을 배려해 줄 수 없는 것처럼 인터넷 공간에서의 비대면성과 익명성, 그리고 온라인 게임의 폭력적 특성들은 윤리나 규범이 설 자리를 주지 않는다.
이런 취약성을 잘 이해하면서 사이버폭력을 줄이기 위한 정책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고,
디지털 세대에 대한 윤리, 규범 재교육 방법들이 연구되고 시행되어야할 것이다.
인터넷 공간은 사이버 오락실 우리나라는 인프라 측면만 고려하면, 세계에서 가장 정보화된 나라이다.
초고속인터넷망 보급률이 세계 최고이고, PC방이 가장 많으며, 인터넷 접속인구 비율도 세계 최강이다.
그러나 정보화된 인프라를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은 선진국과 비교해서 떨어지고 오히려 오락과 휴식을 위해 사용하는 비율은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흥미 있는 보고서가 최근 발표되었다.
미국 앨라배마 주립대 김용찬(신문방송영화학) 교수팀이 서울과 싱가포르, 타이베이의 중학교 2학년 1천303명을 대상으로 인터넷 이용실태를 비교 조사했는데, 인터넷을 ‘오락과 휴식’ 매체로 꼽은 응답비율이 서울이 다른 두 도시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
반면, ‘장래 직업적 성공을 위해 인터넷을 전문가 수준으로 사용해야 될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는 비율에 있어서 서울은 다른 도시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한국사회조사연구소의 조사에서도 청소년의 91.4%가 온라인 게임을 해 본 경험이 있으며, 하루 평균 126분(주말 227분)의 인터넷 사용시간 중에 온라인 게임하는데 96분(주말 195분)을 할애하여 인터넷 사용시간도 많지만, 주로 게임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현상은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주니어네이버의 검색순위에도 그대로 반영되는데, 6월 마지막 주 통계에서 20위 이내의 검색어 중 15개가 게임과 관련된 것이었고, 나머지 5개도 모두 애니메이션 등 오락에 대한 것이었다.
교육부에서는 98년부터 교육정보화를 위해 1조4천억 원을 투입해서 1만여 개 이상의 학교에 컴퓨터실을 만들고, 인터넷 전용선을 설치해서 초등학생 96%, 중고등학생 99%가 인터넷을 사용하도록 하는 획기적인 업적을 이룩했다.
그런데, 바로 그 청소년들은 애석하게도 교육부의 의도와 달리 인터넷을 학습을 하거나 정보를 얻는 등 교육적인 목적으로 활용하는 대신에 주로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청소년들이 인터넷 공간으로 이동한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그렇지 않은 외국과 다른 독특성을 갖는데, 그것은 ‘오락과 게임 영역’에서 독보적이라는 점이다.
인터넷 카페로 대표되는 동호회 모임 사이트를 서비스하는 ‘다음’과, 게임을 주로 서비스하는 ‘한게임’ ‘넥슨’, 그리고 1인 미디어인 블로그 형 미니홈피를 제공하는 ‘싸이월드’ 등은 오락을 추구하는 청소년 디지털 세대를 발판 삼아 세계 10위권의 접속률을 자랑하는 인터넷 기업으로 성장했다.
인터넷이 오락과 휴식, 욕망을 소비하는 도구로 이용된다는 점은 네티즌들에게 인터넷 윤리나 규범을 존중하는데 약점으로 작용한다.
단지 쉬고 싶고, 오락을 즐기는 동안만이라도 윤리나 규범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은 인간의 공통된 심리이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는 등 약간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오락이나 쉼을 누릴 수 있는가의 문제와 같다.
인터넷 공간이 정보를 주고받고, 학습을 하는 생산적인 공간이 아니라 이미 오락하는 공간으로 변질된 현실에서 네티즌들에게 윤리와 규범을 강조하는 것은 요즘 말로 ‘생뚱맞는’ 일이다.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편히 쉬거나 놀아보자고 하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문화철학자 호이징가가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을 주장했을 때의 ‘놀이’는 지금 우리가 사이버 오락실에서와 같은 단지 재미있게 놀면 그만인 ‘오락’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놀이는 인간 특유의 자유와 창조성, 그리고 상상력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놀이는 스스로의 욕망에 대한 절제와 타인에 대한 존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가 재미있는 것은 공평한 규칙이 잘 작동될 때이다.
그리고 그 경기에 자신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 진정한 놀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놀이터는 태생적으로 자본이 동원된 욕망을 판매하는 ‘사설 놀이시설’일 뿐이다.
최근 네오위즈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요구르팅’이나 NHN이 서비스하는 ‘아크로드’ 등의 온라인 게임은 제작비만 무려 100억 원이 들어간 대작들이다.
100억 원을 들여 만든 놀이터에서 호이징가가 말하는 진정한 놀이, 인간이 주인이 되는 놀이는 가능치 않다.
놀이다운 놀이를 잃어버린 사이버 오락실, 사이버 놀이터에서 ‘놀이하는 인간’은 단지 욕망을 소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례하고 천박한 네티즌으로 전락하고 있다.
온라인 게임 내에서 이유 없이 자신의 캐릭터가 폭행을 당해 죽었다고 인근 PC방을 찾아가 상대방을 칼로 찌른 사건이 우리나라와 대만에서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다.
레이싱 게임에 빠진 초등학생이 실제 자동차를 훔쳐 타고 돌아다니다 사고를 낸 사건도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PC방에서 게임에 빠진 신세대 부부가 4개월 된 아이를 방치해서 죽게 만드는 사건도 있었다.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게임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종종 뉴스의 한 장면을 장식하곤 한다.
매일 같이 쏟아지는 온라인 게임으로 인한 사건 사고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재미와 오락이 오히려 인간을 속박하는 해악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지나치면 해가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네티즌들은 사이버 놀이터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그리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는 특단의 백신을 발견해서 접종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인터넷 공간의 강점이 도리어 약점이 될 수 있어 약점은 강점이 지나치게 표현된 것이라고 정의된다.
인터넷 공간이 갖는 강점들은 때때로 지나치게 표현되어 약점으로 돌아온다.
이를테면, 인터넷 공간에서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따로 없으며, 지식의 많고 적음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의 차이도 없는 이상적인 평등 사회이다.
이러한 강점 때문에 인해 청소년들은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눌리지 않고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다.
역대 어느 시대에 청소년들이 어른들과 마주앉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는가?
인터넷의 최대 공헌 중의 하나는 사회적 약자들이 발언권을 얻었고, 자신의 의사를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2002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월드컵 길거리 응원의 열기 중심에도 인터넷이 있었고,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는 촛불집회의 열기 뒤에도 인터넷의 공헌이 컸다.
법보다 고치기 어려운 관행을 깨뜨린 강의석 군의 종교의 자유 투쟁도 인터넷의 후원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청소년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담아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인터넷 공간의 강점이 지나치게 표현되어 많은 청소년들을 사이버 범죄자로 만들기도 한다.
2003년에 이미 사이버 공간에서 저지른 범죄로 벌금 이상의 형을 받은 청소년은 1만 명을 넘어섰다.
80년대 의식 있는 많은 청년들이 시국사범이 되었지만, 오늘날 청년들은 사이버 범죄자로 전락하고 있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인터넷의 강점을 잘 살려서 창조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인터넷 공간에서의 윤리와 규범, 절제와 타인에 대한 배려는 매우 중요한 네티즌의 덕목이 되어야 한다.
인터넷은 인간의 능력으로 구축한 새로운 피조세계이며, 디지털 개척지이다.
이 새로운 세계를 지속가능한 세계로 만들기 위해, 디지털 세대들이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인터넷 공간의 특성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윤리 규범을 만들어야할 과제에 직면해 있다.
권장희 helper@gamemedia.or.kr
놀이미디어교육센터 소장